[온 이야기] 러시아의 세계시민을 기대하며
04-14
정우탁(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
요즘 러시아가, 정확히 푸틴이 지구촌의 문제아가 되었다. 자기보다 약한 나라를 마구 침략하는데도 다들 보고만 있다. 21세기 이 지구상에 정의가 아직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럴 때 러시아에 정의로운 ‘세계시민’이 다수 존재한다면 과연 푸틴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분명 러시아에는 소수의 세계시민이 존재하지만, 아직도 다수의 러시아인은 러시아 영토와 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한 집착으로 푸틴을 지지하고 있기에 지금과 같은 황당한 일들이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다.
필자는 1980년대 초 <닥터 지바고>란 영화를 보고 러시아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당시 엄혹한 한국 정치로 숨쉬기도 어려울 때 러시아 혁명을 소재로 한 낭만적인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러시아 혁명에 매료되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김홍명 교수의 <소련정치론>을 들으면서 내 진로를 아예 <러시아 혁명사> 연구로 잡았다. 당시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러시아사를 전공한 이인호 교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정치학에서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3개월간 벼락치기로 대학원 시험 준비를 하고 응시했는데, 천만다행(?)으로 낙방이었다. 그리고 백수 생활을 몇 개월 하다가 우연히 입사한 곳이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이다. 거의 30년을 근무했으니 운명은 따로 있었나 보다.
짝사랑 러시아를 직접 만나게 된 것은 1997년 여름이었다. 아시아 저개발국 교육지원사업으로 우즈베키스탄을 현지 방문하게 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항공편이 모스크바를 경유해서 타슈켄트로 갔다. 설레는 가슴으로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했는데, 입국 심사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줄을 선다는 개념도 없고, 새치기는 기본이었다. 가방은 모두 개봉 검사. 땀에 젖어 정장은 볼품없어졌고, 거의 3시간 만에 공항 대기실로 나왔는데 그곳도 인산인해. 호객행위로 아수라장이었다. 겨우 라다라는 구소련제 작은 차에 짐을 싣고 모스크바 시내에 당도했더니,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나를 맞이하였다.
실망과 경탄이 교차하는 며칠을 보내고 우즈베키스탄으로 출국하던 날. 공항은 남쪽에 있는 도모데도보 국제공항이었는데, 출국 카드가 러시아어였다. 겨우 짐작으로 작성하는데 여러 번 찢고 다시 써야 했다. 출국 심사받는데 자꾸 나를 쳐다보더니 여권 사진과 내 얼굴이 다르다고 안쪽 사무실로 들어오란다. 거기서 30여 분간 심문받았다. 겨우 들어 온 공항 내부는 8월 한여름인데도 에어컨이 없어서 땀에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다. 탑승 게이트를 통과하니 모두 활주로를 달린다. 의아해하면서 천천히 걸어갔더니 먼저 온 사람들이 기내 좌석을 선점하고 드러누워서 빈자리가 없었다. 항공권을 보니 좌석 번호가 없었다. 겨우 기내 끝 좌석에 자리 잡았는데, 이륙 때에도 드러누워 자는 사람,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승무원이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이제껏 내가 경험했던 비행기 중 가장 자유분방했던 비행기였다. 내릴 때가 되니 모르는 사람이 비닐에 싼 카 오디오 세트를 주며 통관시켜 달란다. 내가 거절했더니 욕을 한 바가지 했다. 그것이 1997년, 나와 러시아의 첫 만남이었다.
2013년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모스크바가 많이 안정된 느낌이었다. 모스크바는 푸시킨과 체호프와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의 도시였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키릴 카슈닌은 한국을 좋아해서 이후 매년 여름이면 한국에 와서 연주회도 하고, 여행도 했다. 별빛이 쏟아지는 한여름 밤에 종로구 부암동 한옥 무계원에서의 연주회는 아직도 잊지 못할 이름다운 추억이다.
2017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갔었다. 파리에 버금가는 도시였다. 러시아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중·고등학생들이 예술 활동하는 학생 궁전은 말 그대로 궁전이었다. 마룻바닥을 밟을 때마다 나는 삐거덕 소리, 기품있는 벽과 장식들, 천정도 높고 품위 있는 회의실과 행사장. 한국에서는 만나기 힘든 고전풍 건물이었다. 거리 곳곳에는 공원과 운하가 있고, 국립 예르미타시 박물관에는 세계적인 명작들이 즐비했다. 러시아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일주일 동안의 행사로 한국 학생들과 정이든 러시아 학생들이 헤어질 때 울며 작별을 아쉬워했는데…. 그때 그 학생들은 지금 이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세 번째 방문에서야 러시아는 속살을 조금 드러내며, 나름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양파 껍질 벗기듯이 하나씩 벗겨야만 알 수 있는 나라. 많은 매력을 지녔으나 누구와도 친해지지 못한 러시아가 나는 안타깝다. 문학과 예술의 나라 러시아가 음침하고 음흉한 러시아로 각인되는 것은 러시아의 불행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를 생각나게 하는 러시아는 버려야 할 러시아이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으로 나쁜 이미지를 쌓은 러시아가 이번에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또다시 침략자라는 이미지를 덧칠하고 있다. 아무리 영토가 중요해도 21세기에 민간인을 살상하며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인류의 적이 되고 말았다. 호전적 침략자 러시아는 지금 치명적 내상을 입고 있다. 지금의 이러한 러시아가 세계 평화 애호국으로 환골탈태하는 유일한 길은 러시아의 자라나는 세대에게 세계시민교육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푸틴 같은 구시대 인물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러시아인들이 세계시민이 되어야 한다. 단순하지만 첩경이다.
사진 설명
1. 1980년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닥터 지바고>의 신문 광고.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2. 2017년 부암동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에서 열린 한 여름밤의 한옥음악회 <피아니스트 키릴 카슈닌 & 금혜승 초청 듀오 리사이틀>에서 연주 중인 키릴 카슈닌. 출처: 종로문화재단
3. 이탈리아 모자이크가 바닥에 설치된 국립 예르미타시 박물관의 홀. 출처: schusterbauer.com/Shutterst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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