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사람] 도산의 딸, 수잔 안 커디의 도전
04-14
“삼일절! 이 날은 가장 신성한 날이요. 대한민국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니 진실로 상제가 허하신 날이오.
이 날은 일이 개인이 작정한 것이 아니오. 2천만이 하였고 다만 소리로만 한 것이 아니오. 순결한 남녀의 혈로 작정한 신성한 날이오.“
- 안창호, 3.1절 제1주년 축사에서
3.1절을 맞이하여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의 딸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미국 해군 장교가 된 안수산(Susan Ahn Cuddy, 1915-2015)의 삶을 돌아본다. 그녀의 삶은 도전 그 자체였다. 안수산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도산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들의 집은 한국인 이민자들을 위한 지원센터로 사용되었다. 12살 때 한국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떠난 아버지와 이별한 후, 생계를 위해 농장 일을 하고 세탁물을 배달했으며 중학교 때는 같은 반 학생의 과외선생도 했다.
1900년대 초반의 미국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극심한 사회였다. 도산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만든 흥사단의 단원들은 안수산에게 조선의 여인처럼 얌전하게 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안수산은 대학에 진학했고 대학 야구부의 주장을 맡을 정도로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녀의 자립심과 진취성은 재미 한인사회의 계몽과 교육에 힘쓴 아버지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남편 없이 5남매를 키우며 한인 여성애국단체를 통합하여 ‘3.1대한여성애국구국단’을 창단한 강인한 어머니를 닮은 것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안수산은 항일운동을 하다 옥중에서 사망한 아버지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미군에 입대하기로 결정한다. 아시아 여성이라는 이유로 군대에서 받아주지 않자 군 입대에 재도전했고, 27세에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해군이 되었다. 군에서도 차별을 받았지만 모든 종류의 총을 다룰 줄 아는 사격수로 성장했고, 훈련기 교관으로도 활동했다. 1946년 대위로 해군에서 복무를 마친 후에는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해군정보부에서 비밀 정보분석요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안수산은 해군정보부에 근무하면서 아일랜드계 미국인 프란시스 커디를 만나 결혼했다.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국가안보국에서 근무했고 국방부의 기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9년에는 남편, 두 자녀와 함께 어머니가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가족들과 식당을 운영하며 한인 커뮤니티를 지원하고 부모와 한인 이민자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다양한 커뮤니티 간의 연결을 위해 애쓰기도 했다.
안수산의 개척 정신과 도전 정신은 아시아계 미국인과 여성들에게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서거일인 3월 10일을 ‘안수산의 날’로 선포했다. 그녀는 기념식에서 “내게는 동양인이건 아니건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중요한 건 제2차 세계대전 중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2015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후에 미 국무부가 운영하는 ‘셰어 아메리카(Share America)’는 웹사이트에 ‘미국의 영웅 수잔 안 커디’에 대해 소개했다. 안수산은 독립운동가의 딸이자 용감한 장교, 공동체의 지도자였으며 또한 현재까지도 미국의 영웅으로 기억된다.
영상
https://www.defense.gov/News/Feature-Stories/Story/Article/2586537/navy-lt-susan-ahn-cuddy-carved-the-path-for-asian-american-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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